창밖 풍경은 바람이며 땅이며 버스정류장 벤치마저도 얼어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오후는 길게 흘러갑니다. 오늘 고른 책은 우리가 가장 좋아하면서 가장 나중으로 미루는 일이기도 한 여행과 독서를 한데 엮은 책입니다. 여행지는 무려 런던이고요. 

CBS 정혜윤 피디의 ‘런던을 속삭여줄게’에는 런던과 관련된 작품과 작가와 예술가가 팝콘처럼 유쾌하고 자유롭게 튀어나옵니다. 세헤라자드의 천일야화처럼, 해리 포터의 여정처럼 절대 끊이지 않을 것 같은데 어느새 마지막 장에 도착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힌 아이작 뉴턴과 워즈워스의 인연을 언급하다가, 느닷없이 워즈워스의 고향 레이크 디스트릭트를 찾아요. 바이런, 셸리, 키츠의 기념비 앞에선 목례대신 재미있는 상상과 예술가들의 작품들을 리뷰하면서 자유로운 페이지들을 이어갑니다.

트라팔가 광장, 런던탑 등 런던의 유물과 관광지들을 둘러보는데, 온갖 재미있는 이론과 근거와 증거를 끄집어옵니다. 읽은 지 몇 해가 지났는데도 당시 방대한 독서량과 상상력에 반해서 달려가 악수를 청하고 싶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대영박물관을 찾았다가 이런 글을 남겼어요.

“런던은 지저분한 도시이지만 그 한가운데 박물관에 대리석으로 신들의 시간을 보관하고 있다. 마치 근엄한 청교도가 과거의 색정적이고, 즐겁고, 황홀한 죄악의 시간을 기억 깊숙이 묻어두고 있는 것처럼.”

(작가가 좋아한다는 이 문구를) 저도 좋아합니다. 양면성은 인간을 인간일 수 있게 하는 원동력 중 하나이고, 죄책감이 없다면 우린 애벌레에 지나지 않을 거예요. 무엇보다 욕망은 그것이 집착으로 이어지지 않는 한 건강하고 짜릿한 일이니까요.

제목처럼 속삭이듯 씌여서 읽는 동안 기묘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아직 추울 날이 많이 남았다죠. 넘실넘실 이야기꾼의 속삭임에 빠져보셔도 좋겠습니다. 

 

 

에디터 안은영 eve@slist.kr (작가,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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