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다드 팝 뿌리내린 대형가수 패티김 

 

 

2013년 10월 26일 늦은 저녁.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만여 명의 합창이 밤하늘을 적셨다.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냉정한 사람이지만/ 그렇게 사랑했던 기억을/ 잊을 수는 없을 거야’ 가수생활 55년 동안 흙 묻은 신발을 벗고 늘 새 신발을 갖춰 무대에 올랐고, 드레스 자락이 구겨질까 대기실에선 늘 선 채로 목청을 다듬었던 패티 김의 노래 ‘이별’. 은퇴 선언 후 일 년 동안의 투어 대장정 마침표를 찍는 마지막 무대였다. 

 

안녕하세요 패티 김입니다

패티 김은 1959년 미8군 무대에서 가수활동을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방송연예업계의 강력한 출입구였던 이 곳을 그는 높은 점수의 오디션을 거치며 통과했다. 서구적인 이목구비와 카리스마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뒤 언제나 그에겐 ‘최초’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국내와 해외를 종횡무진하며 자신을 알렸고, 화려한 무대매너와 자기관리로 스스로를 더욱 빛나는 존재로 올려놓았다. 가장 높은 곳, 가장 뜨거운 갈채, 가장 화려한 조명 아래 그가 있었다. 그렇게 자타공인 ‘대한민국 최고의 디바’로 스스로의 이름을 대중음악계의 화석에 새겨 넣었다. 

 

 

누구도 걸어보지 않은 길을 겁내지 않았다. 그는 국제정세의 흐름에 따라 한일 문화교류가 물꼬를 텄을 때 대한민국 문화사절로 초대된 최초의 가수였다. 종로 피카디리 극장에서 단독 콘서트를 연 최초의 가수(1962), 미국 뉴욕과 라스베가스 공연 진출한 한국 최초의 가수(1963)이기도 했다.

전통적으로 대중가수에게는 문턱을 낮춰주지 않았던 세종문화회관이 딱 한 차례 문을 열었던 이유도 ‘패티 김 리사이틀-서울의 연가’를 위해서였다. 이후 오랫동안 이 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1996년과 2013년 각각 문화훈장 5등급과 2등급을 수여했으며 2005년엔 대중문화인 최초로 서울특별시가 주는 서울사랑 시민상을 수상했다. 

 

“명예를 만드는 것도 자신이고 부수는 것도 자신이에요”

그 즈음 패티김을 만났다.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한 시간 가까이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며 의자 등받이에 허리를 대지 않은 유일한 인터뷰이였다. 그는 시작부터 ‘날 만날 준비는 얼마나 되어 있느냐’고 확인했다. 물리적 시간, 마인드, 자존심 어느 하나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아온 자기관리의 여왕다웠다. 노골적으로 기자의 수첩에 시선을 두고, 자신의 말을 정확하게 적을 때까지 기다렸다. 

피안을 보는 듯 강렬한 눈빛은 의외의 표창장이었다. 성대관리가 철칙인 그에게 목주름마저도 거슬렸다. 주름 생길까봐 목을 세우다보니 자연히 눈빛에 힘이 실렸다. 30년 전 드레스를 아직도 입고 있고 기성복 55사이즈가 품은 맞는데 길이가 짧다는 말에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육신은 노래를 담는 도구 

패티 김은 노래를 위해 몸을 쓸 줄 아는 디바였다. 타고난 성량과 호소력 짙은 목소리,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는 등 세련된 표현력은 가창으로만 승부를 걸어온 이전 가수들과는 확실한 선을 그었다. 그의 파워풀한 성대를 거치면 대중의 이목이 집중됐다. 

‘초우’ ‘이별’ ‘사랑은 생명의 꽃’ ‘서울의 찬가’ ‘못잊어’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등 수많은 히트곡이 터져 나왔다. 가수로서의 감성과 여인으로서의 순정은 노래의 전달력을 배가했고, 실제로 1966년 스타 작곡가 길옥윤과의 결혼과 이혼, 아바라도 게다니와의 재혼을 거치며 삶의 파란을 겪기도 했다. 

일본풍의 엔카 아니면 민요가 전부였던 시절 스탠다드 팝, 빅밴드 뮤직으로 글로벌 가수의 길을 연 패티김은 2013년 10월 ‘가을을 남기고’ 떠났다. 

 

“공연을 앞두고서 얼마나 초조하고 긴장되고 두려운지. 목이 쉬지 않을까, 살이 찌면 어쩌나, 예전보다 더 잘 불러야 하는데…. 부담감과 압박감은 날이 갈수록 더욱 커져 제 어깨는 천근만근처럼…. 내일부터는 저 김치에 밥도 한가득 먹고, 아이스크림도 도넛도 맘껏 먹으렵니다. 55년간 노래해온 저에게 가수는 운명이자 기쁨이자, 축복이었습니다. 오랜 세월 보내준 박수 잊지 않고 간직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에디터 안은영 eve@slist.kr 

저작권자 © 싱글리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